오타니 요시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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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타니 요시쓰구는 1565년경에 태어난 센고쿠 시대의 무장이다.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으로,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웠으며, 특히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활약했다. 1589년에는 쓰루가 성주가 되었고, 임진왜란에도 참전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시다 미쓰나리와의 우정 때문에 서군에 가담하여 싸웠으나 패배하여 자결했다. 그는 뛰어난 지략과 인품으로 칭송받았으며, 세키가하라 전투를 다룬 다양한 작품에서 영웅적으로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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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니 요시쓰구 | |
---|---|
기본 정보 | |
이름 | 오타니 요시쓰구 |
본명 | 오타니 기쓰구 |
다른 이름 | 기쓰타카 기노스케 헤이마 하쿠토 |
어린 시절 이름 | 게이쇼 |
계명 | 계코인덴젠교부쿄신게쓰하쿠토다이젠조몬 |
출생 | 1558년 또는 1565년 시가현 |
사망 | 1600년 10월 21일 기후현세키가하라 |
직위 | 교부쇼유 쓰루가 번 영주 |
가문 | |
씨족 | 오타니 씨 |
가문 | 오타니 가문 |
아버지 | 오타니 요시후사 오타니 모리하루 |
어머니 | 히가시도노 (고다이인의 시녀) |
형제자매 | 여동생: 고야 (기타만도코로 시녀, 오쿠라반), 시모쓰마 라이료의 부인, 이시카와 사다키요의 부인 |
자녀 | 요시하루 (요시카쓰) 기노시타 요리쓰구 지쿠린인 (사나다 유키무라의 정실) 야스시게 |
친척 | 사나다 유키무라 (사위) |
군사 경력 | |
소속 | 도요토미 씨 서군 |
참전 전투 | 미키성 공방전 다카마쓰성 공방전 야마자키 전투 시즈가타케 전투 오시성 공방전 임진왜란 세키가하라 전투 |
지휘 | 오타니 가문 |
관직 및 작위 | |
관위 | 종5위하 |
관직 | 교부쇼유 |
기타 | |
묘소 | 후쿠이현쓰루가정 에이쇼지 기후현세키가하라정 시가현마이바라시 |
추가 정보 | |
개명 이유 |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에 가담하기로 결정했을 때, 이름 '요시쓰구'가 '미요시 요시쓰구'와 발음이 비슷하여 불길하다는 이유로 '요시타카'로 개명했다고 함. |
묘비 | 세키가하라에 있는 요시쓰구의 묘비는 '오타니 요시타카의 묘'로 국가지정 사적. 진터에 있는 비석에는 '오타니 요시타카 진터', 묘비 안내판에는 '오타니 요시타카 (요시쓰구)'라고 기록됨. |
2. 생애
오타니 요시쓰구는 나병과 이시다 미쓰나리와의 각별한 우정으로 일본에서 유명하다.[1] 특히 미쓰나리와의 우정은 한국에서 쌓았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와 관련된 일화가 전해진다. 비밀 다도 모임에서 요시쓰구의 얼굴에서 떨어진 고름이 섞인 차를 미쓰나리가 아무렇지 않게 마셨다는 이야기는 두 사람의 깊은 신뢰를 보여준다.
요시쓰구의 어린 시절 이름은 게이마쓰(桂松 또는 慶松)였는데, 이는 아버지가 하치만 신사에서 얻은 계시와 관련된 전설에서 유래한다. 히데요시를 섬기던 초기 시절에 헤이마(平馬)라는 법적 별명을 얻었으며, 하리마에서 기병을 지휘했거나 미키 공성전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후 기노스케(紀之介) 또는 노리노스케(乗之介)라는 별명을 사용했으며, 굥부(刑部)라는 호칭을 얻기도 했다. 굥부라는 호칭은 당시 요시쓰구의 높은 지위를 나타내거나 겐지 가문과의 관계를 보여주기 위해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나병으로 인해 창백한 외모를 가지게 되어 "백두"(白頭)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전설에 따르면 흰 가면을 쓴 것이 이 별명의 유래라고도 한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전, 요시쓰구는 미쓰나리에게 그의 행동이 무모함을 여러 번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친구의 굳은 신념에 감복하여 결국 서군에 합류했다. 당시 요시쓰구는 건강이 악화되어 거의 실명 상태였고, 가마에 실려 전장으로 향했다.
요시쓰구는 약 600명의 병사를 이끌었고, 토다 시게마사(戸田重政), 히라츠카 타메히로(平塚為広), 오타니 요시카쓰(大谷吉勝)(그의 아들), 키노시타 요리쓰구(木下頼次) 등은 약 4000명의 병사를 지휘했다. 고바야카와 히데아키가 배신하여 요시쓰구의 부대를 공격했고, 아카자 나오야스(赤座直保), 오가와 스케타다(小川祐忠), 쿠츠키 모토쓰나(朽木元綱),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등 총 2만 명이 넘는 군대가 합류하면서 요시쓰구의 부대는 수적 열세에 몰렸다. 시력을 잃은 요시쓰구는 가신 유아사 고스케(湯浅五助)에게 전황을 묻고, 패배를 확인하자 자신의 목을 베도록 명령했다. 그의 가신은 그의 목을 베었고, 이어 할복했다.
2. 1. 출신 및 초기 생애
요시쓰구의 출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오미국(近江国)(시가현) 출신이라는 설과 분고국(豊後国) 출신이라는 설이 있는데, 현재는 오미 국 출신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6] 아버지는 롯카쿠 씨(六角氏)의 가신이었던 오타니 요시후사(大谷吉房)로 알려져 있으며,[7] 어머니는 고다이인(高台院)의 시녀였던 히가시도노라고 한다.[9][10][11][12] 요시쓰구의 어린 시절 이름은 게이쇼(慶松)였으며,[41] 이는 아버지가 하치만 신사에서 얻은 계시와 관련된 전설에서 유래한다.2. 2. 히데요시의 가신 시절
텐쇼(天正) 초, 오타니 요시쓰구는 히데요시(秀吉)의 소년(小姓)이 되었다. 1577년(덴쇼 5년) 10월, 히데요시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에게서 하리마국(播磨国) 공략을 명령받아 히메지성(姫路城)을 근거지로 삼았을 때,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 이치야나오 나오스에(一柳直末),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 카토 기요마사(加藤清正), 센고쿠 히데히사(仙石秀久) 등과 함께 히데요시의 기마중(御馬廻り衆)의 한 사람으로서 오타니 헤이마(大谷平馬)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13] 1578년(덴쇼 6년) 5월 4일, 아마고 카츠히사(尼子勝久)가 카미즈키성(上月城)에서 모리 테루모토(毛利輝元)의 군세에 포위되었을 때, 히데요시는 아마고 군을 구원하기 위해 출진했는데, 이때 요시쓰구도 종군했다.[14]그 후 미키성(三木城) 공격에는 기마(馬廻)로서 종군하여, 10월 15일 히라이산(平井山)에서 열린 히데요시 진중(陣中) 연회에도 오타니 헤이마(大谷平馬)로서 이름을 올렸다.[15] 이때의 녹봉(祿)은 150석이었다는 설과 250석이었다는 설이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
1582년(덴쇼 10년) 4월 27일, 히데요시는 모리 측의 시미즈 소지(清水宗治)가 농성하는 비추 고마쓰성을 공격했다. 이때도 요시쓰구는 히데요시의 기마(馬廻り)로서 종군했다.[16] 그러나, 지금까지의 일화 중 『무공야화(武功夜話)』를 근거로 하는 일화는 위서설이 있기 때문에 신빙성에 문제가 있다.
2개월 후인 6월 2일, 오다 노부나가가 혼노지의 변(本能寺の変)에서 횡사(横死)했다. 히데요시는 6월 13일에 노부나가를 죽인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를 토벌하고, 6월 27일의 기슈 회의(清洲会議)에서 오다씨(織田氏)의 주도권을 획득하여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히데요시와 오다 가문의 중신인 시바타 카츠이에의 대립이 격화되자, 요시쓰구는 히데요시의 미노 국 침공에 말을 타는 무사들(馬廻衆)로서 종군하였다. 1583년(천정 11년)에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가 일어났다. 이때 요시쓰구는 나가하마성 주인 시바타 카쓰토요를 계략으로 내응하게 하였다.
1585년(천정 13년), 키슈 정벌에서는 마스다 나가마사와 함께 2,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종군하여, 끝까지 저항하는 키슈 세력의 스기모토 아라호시를 창으로 찔러 죽이는 무공을 세웠다. 이는 『네가이지소각오타책세기』에 기록되어 있다. 히데요시가 이세나가시마성로 이주한 오다 노부오를 축하하기 위해 갈 때에도 동행하였다. 문서 발급도 이 무렵부터 보이며, 쇼묘지에 사찰 영지 안도장을 "오타키 기노스케"라는 이름으로 발급하였다.[18]
1585년(덴쇼 13년) 7월 이전에 기독교로 개종한 것으로 여겨지며, 선교사 가스파르 코엘료가 히데요시를 방문했을 때, 아이 료사와 함께 코엘료에게 과일과 말린 감을 가져다주었다.[19] 이것은 1586년(천정 14년)에 프로이스가 당시 인도 관구장 발리냐노에게 보낸 보고서[20]에서 기리시탄이라고 적혀 있는 "키노스케 덴"이 키노스케(기노스케)라고도 불렸던 오타니 요시쓰구라고 무라카미 나오지로[21], 마쓰다 타케이치[22] 등이 확인한 것이지만, 미카엘 슈타이셴『기리시탄 다이묘』나 유키 리오고 "기리시탄 다이묘 일람"에는 요시쓰구의 이름이 없다.[23].
같은 해 7월 11일, 히데요시는 코노에 사에히사의 양자가 되어 종일위·관백에 서임되었는데, 이때 여러 대부 12명을 두고, 요시쓰구는 종오위하 형부소부에 서임되었다. 이로 인해 "오타니 교부"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 무렵부터 원래 다이치타카노하였던 가문의 문장을 짝을 이룬 나비 문양으로 변경했다고 한다.[24] 9월에는 히데요시의 아리마 온천탕치에 이시다 미쓰나리 등 다른 측근들과 함께 동행하였다(『우노 모스이 일기』).
1586년(천정 14년)의 규슈 정벌에서는 병참봉행인 이시다 미쓰나리 밑에서 공적을 세웠다. 같은 해, 미쓰나리가 사카이 봉행에 임명되자, 그 휘하에서 실무를 담당하였다. 모리 테루모토가 저술한 『테루모토 조라쿠 일기』에는 1588년(천정 16년)에 테루모토가 상락했을 때, 도움을 받거나 인사를 다녔던 도요토미 가문이나 여러 다이묘의 이름과 각각에 대한 헌상품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하권에 오타니의 이름도 보인다. 이 시점에서 봉행급에 올라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589년(천정 17년)에 에치젠 국쓰루가 군 2만 석을 받아 쓰루가성 주인이 된다. 요시쓰구는 하치야 요리타카가 축성한 쓰루가성(현재의 쓰루가 시 유키정, 미시마정)을 개수한 것으로 전해지지만, 요시쓰구 이전에 도요토미 히데카쓰가 성주가 되어 있었고, 천수각은 히데카쓰 시대에 완성되었다는 설도 있다. 쇼노가와·코야노가와 두 강을 경계로 마을을 조성하여, 구획을 강서·강중·강동의 세 마을로 개편하였다.
1590년(천정 18년)의 오다와라 정벌에도 종군하고, 이어 오슈 시치에도 종군하여 데와 국의 검지를 담당하였다. 이때 카키자키 요시히로를 만나 독립 승인과 도요토미 정권에의 신종에 대해 협력을 요청받았다. 검지에서는, 배하의 대관이 저항하는 농민을 베어 죽인 것이 발단이 되어 일키가 발생했지만, 우에스기 가게카쓰의 지원을 요청하여 진압하였다. 귀환 후, 난죠 군·타니우 군·이마다테 군의 마을 63개 마을, 2만 6,944석을 가증 받아, 이 무렵 소위 "쓰루가 5만 석"을 영유하게 되었다.
분로쿠 원년(1592년)부터 시작된 히데요시의 조선 출병(분로쿠·게이쵸의 역)에서는 선봉행·군감으로서 선박의 조달, 물자 수송의 준비 등을 담당하여 그 기량을 발휘하여 공훈을 세웠다. 같은 해 6월에는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봉행중의 한 사람으로서 하세가와 히데카즈·마에노 나가야스·키무라 시게쓰구·가토 미쓰야스·이시다 미쓰나리·마스다 나가마사 등과 함께 건너가, 특히 오타니·이시다·마스다의 세 사람은 히데요시의 지령을 받아 조선 여러 장수를 지도함과 동시에 현지 보고를 정리하였다. 명과의 화평 교섭에서도, 명 사신(사용지·서일관)을 수행하여 이시다·마스다와 함께 일시 귀국하여, 1593년(분로쿠 2년) 5월 23일에 나고야성에서 히데요시와 명 사신의 만남을 성사시켰다. 그 후, 다시 조선으로 건너갔지만, 6월에 진주성 공방전에서 진주성을 공략하자 전황은 화평 교섭으로 정체되었고, 윤9월 상순에 귀국하였다. 최종적으로 결렬된 화평에서는, 명의 히데요시 책봉에 있어서, 요시쓰구는 이시다 미쓰나리, 고니시 유키나가, 우키타 히데이에, 마스다 나가마사와 함께 대도독의 관위를 받을 예정이었다.
1594년(분로쿠 3년)에는 고쓰에서 탕치에 갔으며, 나오에 가네쓰구에게 "눈이 몹시 아파서, 염려되는 바이나 인장으로써 알려드립니다"라는 서장을 보냈다. 1597년(게이쵸 2년) 9월 24일, 히데요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후타 토모노부·오다 유라쿠사이 등을 수행하고, 후시미의 오타니 저택을 방문하였다. 요시쓰구는 호화로운 연회로 맞이하였다.[27]. 1598년(게이쵸 3년) 6월 16일의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중납언 서임 축하에는 병을 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참석하여, 히데요시로부터 과자를 받았다.[28]. 1599년(게이쵸 4년)에는 신룡원 본순과 여능을 관람하였고, 병세 호전을 엿볼 수 있다.
1570년대 중후반(십대 중반 또는 20대 중후반)에 하급 고쇼로 히데요시의 휘하에 들어왔거나 미쓰나리(이시다 미쓰나리)의 요리키(가신)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여러 이야기에 따르면 그의 지성과 매력으로 많은 친구를 사귀었다고 하나, 이 주장의 진위는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하시바 가문에서의 초기 활동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자료에서는 혼노지의 변 이후 히데요시를 따른 700여 명의 명명된 인물 중 한 명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가토 토라노스케, 후쿠시마 이치마쓰 등 다른 고쇼들과 함께 시바타 가쓰토요(시바타 가쓰이에의 조카)로부터 나가하마 성을 빼앗았다. 히데요시는 당시 요시쓰구에 대해 "백만 대군을 준다면 그가 이끄는 모습을 보고 싶다"라고 말했다는 미화된 이야기가 전해진다.
요시쓰구의 공적 중 확실한 것은 1585년에 규부쇼유(형부소보)(사소한 사법관)에 임명되었다는 점이다. 그 무렵 요시쓰구는 히데요시의 측근 엘리트 중 한 명으로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겐뇨의 비서 기록인 우노 몬도 니키에 따르면, 요시쓰구와 미쓰나리는 1585년 9월 히데요시가 아리마 온센에 갔을 때 그와 동행하여 같은 온천에 들어갔다. 이때 요시쓰구는 심한 병에 걸렸다고 한다.
1586년 오사카에 머물던 중 폭동이 일어나자 요시쓰구는 직접 진압에 나섰다. 그는 히데요시의 명에 따라 1,000명을 죽였지만, 튀긴 피로 인해 감염되었다. 우노 몬도 니키와 승려 에이슌의 일기라고 전해지는 타몬인 니키에는 요시쓰구의 병에 대한 온화한 기록이 있다. 이들은 요시쓰구가 도시에서 살아있는 생물의 피를 구하려 했다는 소문을 전하는데, 이는 질병을 치료하는 방법으로 여겨졌다. 시즈가타케 전투 이후부터 병에 걸렸지만, 증상이 나타난 것은 이때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역사 기록에는 그의 병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지 않지만, 에도 시대의 이야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그는 나병이나 매독에 걸렸다고 믿고 있다.(체액과의 관련성 때문에 대체 설명으로 매독이 제시되기도 한다.)
그 이후 요시쓰구의 역사는 두 가지 주요 기록으로 나뉜다. 현재 진위 여부에 대한 비판적 분석이 진행 중인 역사 기록이라고 여겨지는 사이후쿠지 엔킨세이는 요시쓰구가 1587년 이시다 미쓰나리와 함께 규슈 정벌에 참여하여 1만 2천 명의 군대를 어려움 없이 이끌었다고 주장한다. 그 공로로 요시쓰구는 5만 석을 받고 쓰루가 성의 영주가 되었다. 그는 현지 관리가 되어 자신의 지역 내 도요토미 가신들의 영토에 1만 석을 분배했다.
1590년 그는 미쓰나리와 함께 오다와라 정벌에 참가했고 오시 성 공성전에도 참석했지만, 두 전투 모두 그의 활동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다. 히데요시가 기이국의 또 다른 진압을 명령했을 때, 요시쓰구는 참여하여 아키타 사네스에의 패배를 가져왔다. 그는 또한 미쓰나리를 따라 여러 폭동에 참여했고, 후시미 성의 요새 건설에도 참여했으며, 임진왜란(1592-1598)에도 참전했다.
요시쓰구는 한국에서 영웅으로 돌아와 오사카 성에서 히데요시의 환영을 받았다. 그는 연회에서 히데요시와 함께 차를 마시도록 초대받았다. 두 사람의 즐거운 시간이 길어지자 요시쓰구의 콧물이 실수로 차 그릇에 떨어졌다. 요시쓰구는 당황하여 자리를 뜨려고 했지만, 히데요시가 그를 눈치챘다. 목이 마르다고 말한 히데요시는 요시쓰구에게 콧물이 떨어진 차 그릇을 건네달라고 요청했다. 그릇을 받은 히데요시는 신하의 능력 있는 손에서 나온 액체는 훌륭할 것이라고 말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마셨다. 요시쓰구는 성인이 된 후 처음으로 울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도요토미 가문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다.
덜 유명하지만 타당한 또 다른 기록은 요시쓰구가 병으로 누워 있었다고 묘사한다. 이 시대 금각사 주지의 일기라고 전해지는 로쿠온인 치로쿠는 그의 병이 심각한 단계로 진행되어 5~6년 동안 거주지 근처를 떠나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의 몸은 힘든 여행을 견딜 수 없었으므로 해외로 항해하거나 큰 전투에 참여할 수 없었다. 전 기록과는 달리 그는 한국 전쟁 이후의 축제, 예를 들어 다이고 벚꽃놀이에 참석하지 못했다. 그는 1598년 히데요리의 궁중 소개를 축하하기 위해 한 번 집을 나섰고, 허약해진 히데요시에게 병 때문에 간식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2. 3. 규슈 정벌과 쓰루가 영주 부임
1586년 규슈 정벌에서 오타니 요시쓰구는 이시다 미쓰나리 밑에서 병참봉행으로 공을 세웠다.[24] 1589년 에치젠국 쓰루가군 2만 석을 받아 쓰루가성 주인이 되었다. 요시쓰구는 하치야 요리타카가 축성한 쓰루가성(현재의 쓰루가시 유키정, 미시마정)을 개수한 것으로 전해진다.[24] 쇼노가와·고야노가와 두 강을 경계로 마을을 조성하여, 구획을 강서·강중·강동의 세 마을로 개편하였다.[24]1590년 오슈 시치에 종군하여 데와국의 검지를 담당하였고, 난조군·타니우 군·이마다테 군의 마을 63개 마을, 2만 6,944석을 추가로 받아 "쓰루가 5만 석"을 영유하게 되었다.[25]
오타니 요시쓰구의 쓰루가 통치는 일본해 무역의 요충지이자 북국의 물자 집산지였던 쓰루가항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직계 가신이 장악하는 데 있었다. 쓰루가 지역은 요시쓰구의 지배하에 북국에서 기나이로의 수송 거점이자 출병 시 물자 조달 거점으로 기능하였다. 요시쓰구는 하야야 요리타카 시대부터 회선업을 경영하던 쓰루가의 가와후네자 두목 도가와씨 일족인 가와후네 헤이에 사부로에게 특권을 부여하여 유통을 장악하였다. 1594년 후시미성 축성 당시 사용된 목재인 "타이코이타"는 도가와씨 일족의 배로 아키타에서 쓰루가를 경유하여 후시미로 운송되었다. 이 외에도 타카시마야 일족도 특권을 인정받고 요시쓰구에게 협력하였다.[40]
1597년 2월에는 대장장이 도네가에 토지세 본전 790관을 영구 면제해 주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지방 산업 육성에도 힘썼음을 알 수 있다. 수군도 편성되어, 훗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마에다 도시나가가 고마쓰성을 공격했을 때 "오타니 수군이 가나자와를 공격한다"는 소문을 퍼뜨려 퇴각시키기도 했다.[40]
사이후쿠지에 발급한 금제 등 문서도 상당수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사찰에 대한 기부도 적극적으로 행하였으며, 히데요시의 명을 받아 조궁신사를 재건하고, 기히 신궁에 조선에서 가져온 전리품인 종을 봉납하였을 뿐만 아니라, 하치만 신사에 본전의 란칸 장식과 도리이, 등롱 등을 기증하였다.[40]
2. 4. 임진왜란 참전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출병(임진왜란)에서 요시쓰구는 선봉행(船奉行) 겸 군감(軍監)으로서 선박 조달, 물자 수송 준비 등을 담당하여 그 기량을 발휘하여 공을 세웠다.[25] 같은 해 6월에는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하세가와 히데카즈, 마에노 나가야스, 키무라 시게쓰구, 가토 미쓰야스, 이시다 미쓰나리, 마스다 나가마사 등과 함께 봉행(奉行)으로서 조선으로 건너갔다. 특히 오타니, 이시다, 마스다 세 사람은 히데요시의 지령을 받아 조선의 여러 장수를 지도하는 동시에 현지 보고를 정리하였다.[25]명나라와의 강화 교섭에서도 명나라 사신(사용지, 서일관)을 수행하여 이시다, 마스다와 함께 일시 귀국, 1593년 5월 23일에 나고야성에서 히데요시와 명나라 사신의 만남을 성사시켰다.[25] 그 후 다시 조선으로 건너갔지만, 6월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성을 공략하자 전황은 강화 교섭으로 정체되었고, 윤9월 상순에 귀국하였다.[25] 최종적으로 결렬된 강화에서 명나라의 히데요시 책봉 시 요시쓰구는 이시다 미쓰나리, 고니시 유키나가, 우키타 히데이에, 마스다 나가마사와 함께 대도독의 관위를 받을 예정이었다.[25]
1593년 조선에서 귀환할 때 9월 길일에 다자이후텐만구에 한 쌍의 학거문현경을 봉납하였는데, 이 거울은 현존하고 있다. 한쪽 명문에는 요시쓰구의 이름이, 다른 한쪽 명문에는 "동·소석·덕·오야"라는 네 명의 여성 이름이 나열되어 있다. 이 중 '동'은 요시쓰구의 어머니 도젠인(東殿)이며, 소석·덕·오야는 요시쓰구의 여동생으로 추정된다.[26]
2. 5. 세키가하라 전투
히데요시 사후, 요시쓰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동맹을 맺을 계획이었다.[1] 1599년, 요시쓰구는 자신의 부하들을 모아 도쿠가와 군대와 함께 타루이 성까지 이동했다. 미쓰나리는 사와야마 성에 있었고 요시쓰구를 자신의 영지로 초대했다. 성문에 들어설 때 병으로 인해 눈이 멀었던 요시쓰구는 무장한 병사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미쓰나리에게 원한을 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쓰나리는 그를 자신의 가신인 시마 기요오키에게 소개했다. 기요오키는 요시쓰구의 서군에 대한 인식을 바꾸었지만, 요시쓰구는 미쓰나리가 승리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에야스의 진영에 남고 싶어했다. 그러나 미쓰나리는 요시쓰구를 설득하여 서군에 합류하게 만들었다. 전설에 따르면, 이에야스는 요시쓰구의 재능을 알고 그의 봉사를 얻기 위해 1만 2천 석을 제공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요시쓰구의 갑작스러운 변절에 이에야스는 진심으로 놀랐다.[58]요시쓰구가 생각을 바꾼 이유는 오늘날까지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기록이 거의 없기 때문에 아무도 그 이유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가 왜 그렇게 했는지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이 있지만, 역사적 증거가 부족하여 실제 근거가 부족하다. 유명한 시나리오는 에도 시대에 만들어졌는데, 그가 우정 때문에 합류했다는 것이다. 이 해석에 따르면, 요시쓰구는 이에야스에 합류하는 것만 생각했고, 미쓰나리에게 세 번이나 합류할 것을 요청받았다. 요시쓰구는 그것이 패배할 원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친구와의 유대감을 버릴 수 없어 아들들과 함께 서군에 합류했다. 또 다른 이야기는 사나다 마사유키의 아내가 서군에 인질로 잡혀 있었다는 것이다. 딸의 결혼으로 사나다 가문과 맺어진 그는 아내의 안전을 위해 반대편에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또 다른 이야기는 그가 우키타 히데이에와 갈등을 빚었고 그를 피하기 위해 이에야스에 합류했다는 것이다. 미쓰나리는 이 소식을 듣고 두 당사자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하여 결국 요시쓰구를 설득하여 남게 했다.
어떤 이유에서든 요시쓰구는 그 후 도요토미 가문을 위해 싸웠다. 그는 마에다 도시나가에게 아사이 나와테 전투의 위험성에 대해 잘못된 정보를 제공하여 니와 나가시게와의 전투를 야기했다는 소문이 있지만, 이는 그와 관련된 또 다른 거짓말일 것이라고 추측되기도 한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전 그의 다른 활동은 명확하지 않지만, 그는 전투 전날 미쓰나리에게 주요 기지를 재배치할 것을 제안했다고 한다. 요시쓰구는 전투에서 6,500명의 군대를 이끌었고, 600명의 군대를 지휘했으며 세 명의 부하가 있었다. 히타쓰카 타메히로(900명), 그의 아들 오타니 요시카쓰(약 2,500명), 키노시타 요리쓰구(1,000명)이었다. 요시쓰구의 지휘 아래 다른 다이묘로는 토다 가쓰시게(1,500명)이 있었다.
요시쓰구는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반역 계획을 알고 있었지만 막을 수 없었다. 고바야카와의 움직임을 감시하기 위해 자신의 군대를 재배치했는데, 그는 예상되는 배신으로부터 동맹국들이 너무 많은 피해를 입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고 한다.
1만 5천 명의 고바야카와 군대가 산에서 서쪽으로 돌진하자, 요시쓰구의 군대는 그들의 진격을 막는 방패 역할을 했다. 능력 있는 정예 군대를 보유한 요시쓰구는 첫 충돌에서 우위를 점했던 것으로 보인다(고바야카와 군대는 370명의 사상자를 냈고 오타니는 약 180명의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고바야카와가 돌격했을 때 그는 이미 토도 타카토라의 지휘 아래 동군과 교전하고 있었다. 토도 타카토라의 군대는 요시쓰구의 측면을 공격했다.
기요오키의 넷째 아들인 시마 기요마사가 요시쓰구의 진영에 있었고, 그가 타카토라를 한 방에 죽이려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기요마사는 타카기 헤이자부로라는 동군 장군에게 쓰러져 죽었다. 기요마사의 죽음은 압도적인 수적 열세로 인해 방어력이 무너진 오타니 측면의 상황을 반영했다. 완전히 패배한 요시쓰구는 자신의 위치를 잃었고 자결했다고 한다. 요시타카로 알려진 것으로 추정되며, 세키가하라에 그의 무덤 표지석이 세워졌다.
그의 마지막 순간에 대한 두 가지 유명한 이야기가 있지만, 둘 다 진위 여부가 의심스럽다. 요시쓰구는 스스로 움직일 수 없었고 가마를 통해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고바야카와와의 전투가 계속되는 동안 그는 근처의 가신인 유아사 고스케에게 전투에서 패배했을 때 알려주라고 지시했다. 패배를 알리는 외침이 요시쓰구의 진영에 여러 번 울려 퍼졌지만, 고스케는 여전히 상황이 바뀔 수 있다고 주장했다. 고스케가 패배를 인정하자, 요시쓰구는 자신의 몸을 가마에서 반쯤 내밀고 자신의 머리를 베었다. 고스케는 이전에 주군의 머리를 적에게 발각되지 않도록 숨기겠다고 약속했지만, 타카토라의 군대에서 도망치려다 전투 중 사망했다. 요시쓰구가 말 위에 몸을 기대고 고스케가 말하자마자 자신의 몸통을 베도록 명령했다는 설명도 있다.
다른 이야기는 에도 시대에 발전한 민간 전승에서 유래했다. 타메히로는 나쁜 소식을 요시쓰구에게 전한 사람이었고, 고바야카와를 막지 못한 것을 매우 후회했다. 그는 후회 속에 자신의 주군에게 자살을 권유하는 시를 읊었는데, 대략 "나는 당신의 이름을 위해 당신의 생명을 버릴지니, 슬프게도 세상의 갑작스러운 종말을 맞이하리라"라고 번역된다. 요시쓰구는 타메히로의 말 뒤에 숨겨진 충성심을 높이 평가하고 "우리는 여섯 갈래 길에 서약하고, 잠시 기다리자, 앞으로의 삶에서 다시 만나리라"라는 자신의 시로 답했다. 그의 답장이 전해졌지만, 타메히로는 이미 고바야카와 병사들에게 죽었기 때문에 읽지 못했다. 요시쓰구는 죽을 준비가 되자 고스케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적에게 자신의 머리를 숨겨달라고 부탁했다. 가마에 앉은 채 요시쓰구는 자신의 배를 창에 찔렀고, 고스케가 그의 머리를 베었다. 고스케는 동군과 싸우다 죽기 전에 주군의 머리를 비밀리에 묻도록 명령했다고 한다.
사진에 묘사된 그의 묘는 왼편에 유아사 고스케(湯浅五助)의 묘가 있으며, 요시쓰구의 묘보다 두 칸 뒤에 위치하여 사후에도 그를 지키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요시쓰구의 묘 오른쪽에는 오타니 요시타카(大谷吉隆)의 묘가 있는데, 이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싸웠고 이에야스의 군대에 패하여 자결한 그의 아들 요시카쓰(吉勝)의 다른 이름일 가능성이 있다.
고스케가 요시쓰구의 머리를 발각되지 않도록 보호하는 급진적인 변형된 이야기도 알려져 있다. 이 버전에서는 고스케가 주인의 유해에 대한 관심을 돌리기 위해 스스로 목을 베었다는 것이다.
영웅이었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요시쓰구는 사무라이 정신과 그의 의무에 대한 충성심으로 계속해서 칭송받고 있다.
3. 질병과 관련된 이야기
요시쓰구는 한센병(나병)을 앓았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지만, 이는 에도 시대 이후에 윤색된 측면이 강하다.[1] 실제로는 눈병을 심하게 앓았던 것으로 보이며, 이로 인해 시력을 거의 잃은 상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요시쓰구가 얼굴을 흰 천으로 가리고 다녔다는 이야기도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 역시 에도 시대에 만들어진 이미지일 가능성이 높다.[1]
요시쓰구가 나병에 걸려 끔찍할 정도로 창백해 보였다는 묘사 때문에 "백두"(白頭)라는 별명이 생겼다는 이야기가 있다. 전설에 따르면 이 별명은 그가 병에 걸렸을 때 흰 가면을 썼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전, 요시쓰구는 건강이 악화되어 거의 실명 상태였다고 한다. 그는 일어설 수도, 싸울 수도 없는 상태였지만, 가마에 실려 전장으로 향했다.
4. 이시다 미쓰나리와의 우정
이시다 미쓰나리와의 깊은 우정은 세키가하라 전투를 배경으로 한 많은 이야기에서 중요한 소재로 다루어진다. 두 사람의 각별한 우정은 덴쇼 15년(1587년) 오사카 성에서 열린 다회에서의 일화로 상징된다.[59] 초대된 장수들이 다완에 들어있는 차를 한 명씩 마시고 다음 사람에게 돌리는 자리에서, 나병을 앓고 있던 요시쓰구가 입을 댄 다완을 모두가 꺼려 병이 옮을 것을 두려워하여 입을 대는 시늉만 하였다. 그러나 미쓰나리는 아랑곳 않고 찻잔을 단숨에 비우고 아무렇지 않은 듯 말을 걸어왔다고 한다.[59] 요시쓰구는 이 일에 크게 감격하여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미쓰나리와 함께 서군에 가담하기로 결심했다고 전해진다.[59]
요시쓰구와 미쓰나리의 관계는 단순한 주종 관계를 넘어선 깊은 신뢰를 보여주는 것으로, 센고쿠 시대에는 드물게 보이는 미담으로 여겨졌다. 심지어 두 사람이 남색 관계였다는 기록도 있다.[58]
다만, 다도회 일화는 에도 시대에 만들어진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49]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는 두 사람의 깊은 신뢰 관계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이야기로 널리 알려져 있다.
5. 평가 및 후세의 인식
오타니 요시쓰구는 사람을 아끼고 지략과 용기를 겸비하여 옳고 그름을 분별할 줄 아는 인물로 평가받았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현인이라고 칭송했다.[58]
도요토미 정권의 고부교로서 세키가하라 전투 때 함께 거병한 이시다 미쓰나리와는 각별한 우정을 나누었다.[58] 센고쿠 시대에는 드물게 우정을 중시했으며, 두 사람이 동성애 관계였다는 기록도 있다.[58]
덴쇼 15년(1587년) 오사카 성에서 열린 다회에서 요시쓰구가 입을 댄 찻잔을 다른 이들은 병이 옮을까 두려워 마시는 척만 했으나, 미쓰나리는 아무렇지 않게 찻잔을 비우고 말을 걸어왔다.[59] 요시쓰구는 이에 감격하여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미쓰나리와 함께 하기로 결심했다고 전해진다.
임진왜란 등에서 군수 물자 보급을 담당하며 군감으로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히데요시는 "요시쓰구에게 백만 군사를 주어 자유롭게 지휘하게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미쓰나리와의 우정 때문에 순사했지만, 요시쓰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도 친분이 있었다. 이에야스는 요시쓰구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게이초 5년(1600년) 7월 아이즈 정벌이 끝나면 영지를 12만 석으로 늘려주겠다고 약속했었다. 이 때문에 요시쓰구가 서군에 가담한 것을 알았을 때 이에야스는 매우 실망했다고 한다.
미쓰나리의 오만한 성격을 걱정한 요시쓰구는 "미쓰나리가 격문을 보내도 평소의 오만한 행동 때문에 도요토미 가를 진정으로 위하는 사람들조차 이에야스 편에 설 것이다. 모리 데루모토나 우키타 히데이에를 대장으로 세우고 미쓰나리는 뒤로 물러나 있는 것이 좋다."라고 간언했다. 미쓰나리는 처음에는 이 간언을 따랐으나, 서군이 편성되자 점차 오만한 태도를 되찾았다. 그 때문에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고바야카와 히데아키가 결국 동군으로 돌아서고 말았다.
요시쓰구는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배신을 짐작하고 방책을 세웠지만, 서군의 병력으로는 이에야스에게 승산이 없어서 히데아키를 막지 못했다.
자결할 때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진영을 향해 "인면수심이다. 원귀가 되어 3년 안에 벌을 내릴 것이다."라고 말하고 할복했으며, 그 저주대로 히데아키가 발광하여 사망했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다.[53]
실제 역사에서는 불분명한 점이 많지만, 에도 시대의 강담 등에서 의로운 인물로 묘사되어 서민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이러한 경향은 현대까지 이어져 세키가하라 전투를 소재로 한 역사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영웅적인 인물로 자주 등장한다.
6. 관련 작품
; 소설
- 미나미하라 미키오(南原幹雄) 『명장 오타니 쿄부(名将 大谷刑部)』(각와쇼텐(角川書店), 1996년)
- 노무라 토시오(野村敏雄) 『인장 - 소설 오타니 요시츠구(仁将—小説大谷吉継)』(PHP연구소(PHP研究所), 1996년)
- 스가 야스마사(菅靖匡) 『소설 오타니 요시츠구(小説大谷吉継)』(가쿠켄M문고(学研M文庫), 2006년)
- 야마모토 야스오(山元泰生) 『오타니 요시츠구(大谷吉継)』(가쿠요쇼보(学陽書房) 인물문고, 2009년)
- 후가시 린타로(富樫倫太郎) 『흰 머리의 사람(白頭の人)』(시오출판사(潮出版社), 2015년)
; 음악
- 사쿠라유키(さくらゆき) 『마주보는 나비(対い蝶)』(작사: 토오노 유키(遠野ゆき), 작곡:
- 사쿠라유키(さくらゆき) 『꿈의 화염(夢陽炎)』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오타니 요시츠구(大谷吉継) 이미지곡(작사: 토오노 유키(遠野ゆき), 작곡:
; 텔레비전 드라마
- 『세키가하라(関ヶ原)』(1981년, TBS, 연기: 타카하시 코우지(高橋幸治))
- 『아오이 도쿠가와 삼대(葵 徳川三代)』(2000년, NHK, 연기: 호소카와 토시유키(細川俊之))
- 『텐치진(天地人)』(2009년, NHK, 연기: 츠다 칸지(津田寛治))
- 『군사관병위(軍師官兵衛)』(2014년, NHK, 연기: 무라카미 신고(村上新悟))
- 『사나다마루(真田丸)』(2016년, NHK, 연기: 카타오카 아이노스케(片岡愛之助))
- 『하는가 가쿠사(どうする家康)』(2023년, NHK, 연기: 시노나리 슈고(忍成修吾))
- 『가쿠사와 산세이의 스마호(家康と三成のスマホ)』(2023년, NHK, 연기: 오치아이 모토키(落合モトキ))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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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kigahara 1600: The Final Struggle for Power (Campaign Series, 40)
https://books.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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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宰府天満宮の鶴亀文懸鏡の願主の考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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智と仁の将 敦賀城主 大谷吉継(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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敦賀PR「よっしー」に任せて 市公認キャラ着ぐるみ披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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福井新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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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에 가담했을 때 이름이 미요시 요시쓰구와 발음이 같음을 불길히 여겨 요시타카(吉隆)라고 개명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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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5년생이라는 설도 있다.
[58]
문서
교고잣키(校合雑記)
[59]
문서
일설에는 요시쓰구가 마실 때 얼굴에서 고름이 흘러 다완에 떨어졌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은 더욱 더 그 차를 마시기를 주저하였으나, 미쓰나리는 고름이 들어 간 채로 차를 다 마시고 “맛있어서 다 마시고 말았으니 차를 한 잔 더 따라줬으면 좋겠다”며 주위를 배려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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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名のために(君がため) 棄つる命は 惜しからじ 終にとまらぬ浮世と思へ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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